영화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곳에 담겨있는 것이 어떤 형태이든 우리가 사는 모습이고, 그런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레오나드와 빅터 두 남자의 창문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는 않아요.
레오나드는 어떻게든 빅터가 창문을 못 만들게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야 그 쪽 집에서 자신의 집 안이 보일 수도 있고, 성공한 산업 디자이너답게 창문의 형태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빅터는 자신의 집에 햇빛이 들길 원하고 이를 쉽게 포기하지 않지요.
이런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둘의 첫 대응에서 나타납니다. 레오나드는 빅터를 설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근거로 삼는 것이 법이에요. 그렇게 창문을 만드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빅터는 그것이 불법이라 하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아요. 대신 어떻게든 대화로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하죠.
이렇게만 두고 보면 레오나드의 말이 더욱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볼 때는 빅터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렇다 할 이유 없이 단지 불법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레오나드의 말보다는 빅터의 집 안으로 들어오는 조금의 햇빛의 가치가 더 호소력을 가지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이 떠올라요. 우리가 만들고 지키며 사는 모든 규칙들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그렇게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인가? 물론 그런 규칙들은 분명 우리 삶에 필요하고 중요한 것임에도 변함은 없어요.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단지 몇 문장으로 일반화 시킬 정도로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 문제는 단순히 규칙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다는 표면적인 문제를 떠나서 그 영역을 좀 더 넓혀가는 듯 보입니다. 두 사람의 살아가는 태도를 통해서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로 말이죠.
레오나드는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눈치도 많이 보죠. (영화 내내 레오나드는 남의 핑계를 대기 바쁩니다.) 자신의 생각보다는 일단 주변의 상황을 고려해서 결정을 합니다. 사실 레오나드의 고민은 어떻게든 창문을 뚫으려는 빅터와 어떻게든 창문을 막으려는 아내의 둘 사이의 절충안 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하거든요. 하지만 빅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태도에서 무엇이 더 옳은 것인가 하는 질문이 두 번째 질문이 될 것 같아요.
규칙을 잘 지키는 레오나드는 빅터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빅터가 레오나드보다는 더 신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는 아마 빅터의 삶의 방식에 좀 더 가치를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레오나드의 잘 사는 인생보다는 빅터의 즐겁게 사는 인생을 말이죠. 그래서 빅터를 만난 이후 레오나드는 조금씩 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빅터의 삶을 약간 부러워하는 듯 하며 따라 하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레오나드가 가장 행복해 보이던 부분은 아내와 딸이 잠시 집을 떠나 집 안에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 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빅터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가치 있다고 느껴진 것은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규칙에 기대어서도 아니고 각자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아닌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둘 사이의 접점을 찾는 방식 말이죠. 하지만 결국 그것도 실패로 끝나죠. 역시 인생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 모양이네요.
+레오나드는 비싼, 소위 말하는 명품이라 불리는 물건들을 사용합니다. 자동차며 전화며 다들 고가의 물건들이죠. 게다가 집은 르 꼬르뷔제가 설계한 Curutchet House 입니다. (이 정도면 집 중에서는 최고의 명품이죠.) 그런데 과연 그런 고가의 디자인들이 정말로 우리가 사는 이 환경을 윤택하고 더 좋은 모습으로 이끌어 줄까요? 당장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작은 햇살 한 조각이 해결 안 되는데 그런 디자인들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예전에 San Soleil을 영어 자막으로 봤다가 충격과 공포를 맛 봤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 영화도 영어 자막만 있는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는데 한글 자막이 오른쪽에 세로로 나오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뻤습니다. 시간이 되는대로 다른 영화들도 보고 싶네요.
+주저리주저리 떠들긴 했지만 주인공이 디자인했다는 그 의자는 정말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영화 자체에 대한 정보보다 이 영화의 음악이 워낙 유명하기에 그 음악 덕에 보게 된 작품입니다.
(영화 시작 할 때 뜨는 황금 종려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찾아보니까 상도 많이 탄 작품이네요)
벌써 25년이 지난 영화임에도 화면에 비친 영상들은 그다지 촌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아요.(물론 영화 자체의 배경이 그보다 과거를, 그리고 문명화되지 않은 자연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요.) 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1986년의 것들 중에 지금 봐서 어색하지 않은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영화의 영상미가 뛰어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영화를 본 후에 가장 강하게 남는 인상은 이 영화의 호소력입니다. 대사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반에 걸쳐서 흐르는 음악과 배우들의 단순한 몸짓이나 표정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서적인 호소력은 무척이나 강합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가 우리가 말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이성적인 영역이 아닌 그 이전의 정서적인 영역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실제 영화에서 이성적으로 말을 하고 설득을 하려는 인물들은 반감만을 살 뿐이죠.)
다만 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여전히 유럽 사회를, 카톨릭이라는 종교를 과라니족의 삶보다 더 우위에 둔다는 관점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영화의 1750년대라는 배경과 선교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겠지만....